▲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유), (주)영화사 진진

[코리아데일리(KD) 정다미 기자] 1970년 적극적인 노동 운동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한 ‘제2의 태일이’들을 담은 영화가 관객들과 만난다.

6일 오후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감독 이혁래, 김정영/제작 플라잉타이거픽처스(유)/공동제공·배급 ㈜영화사 진진)’ 기자 간담회가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는 이혁래, 김정영 감독과 주인공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이 참석했다.

김정영 감독은 “꿈인가 했다. 기나긴 여정을 지나 선생님들과 극장에서 같이 보게 돼 감사하다”고, 임미경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같이 호응해줬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미싱 타는 여자들’은 여자라서 혹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공부 대신 미싱을 탈 수밖에 없었던 1970년대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편견 속에 감춰진 그 시절 소녀들의 청춘과 성장을 다시 그리는 휴먼 다큐멘터리다.

김정영 감독은 “봉제 역사관에 봉제 노동자들의 영상을 찍고 있었다. 공장들을 다니며 찍어서 미싱를 하는 여자 노동자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 한 분이 박태숙 선생님이다.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하셨다. 그분이 이숙희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많은 얘기를 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아카이브 용으로 영상을 만드는 것 보다 영화로 꼭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2018년 1월부터 시작한 프로젝트다”고 기획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이혁래 감독은 “첫 인터뷰는 2018년부터 시작이 됐다. 김정영 감독이 시작하고 진행하고 있었고 저는 2019년에 합류하게 됐다. 마지막 촬영이 2020년 5월 21일이다. 엔딩 촬영을 마지막에 했다”고 오랜 기간 공들인 작품임을 강조했다.

실제 1970년대 평화시장에서 근무한 여성 노동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인 만큼 자료 수집에도 공을 들였다. 영화 속에서도 그 시절의 사진과 편지, 문서 등이 공개되며 몰입도를 더한다. 이 감독은 “자료를 수집하고 사용했을 때 제일 첫 번째 원칙은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사진, 영상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유신시대의 한 풍경으로 남는 것 보다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빛나는 모습이 담긴 사적인 사진들을 사용하고 싶었다”며 “취재원이 본인이 가진 사진, 편지, 글을 내놓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당시 청계피복 노동자 55명이 국가로부터 당한 폭력에 대한 손해배상을 진행 중이었다. 재판이 난항을 겪었던 것이 언제 어떤 사건이 있던 것은 인정하지만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 증명하는 것이 어려웠다. 평화시장은 5~10명 있는 소규모 사업자가 산재해 있어서 국가 폭력의 피해를 당했음에도 존재 증명을 할 수 없었다. 청계피복에서 생산한 문건, 개인적인 사진을 재판을 위해 준비하며 저희가 같이 참여했다. 재판도 좋은 결과를 얻었고 소중하게 간직하던 기록에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큰 행운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 이 감독은 “우리 영화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1977년 9월 9일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한 사건이다. 많이 알려지지도 않고 사회적 파장도 별로 없었다.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마음에는 많이 남아있는 사건이다. 사건보다는 그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동료들과 대화 장면, 옛 사진을 본 반응과 표정, 자신의 일터로 가서 40년 전의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장면에 공을 들이고 싶었다”고 중점을 둔 부분을 설명했다.

▲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유), (주)영화사 진진

1970년대 힘들었던 순간을 다시 꺼내 봐야 하는 만큼 다큐멘터리 참여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고. 이숙희는 “제가 처음 하려고 생각했을 때는 몇 번 인터뷰하고 찍으면 끝나는 줄 알고 가볍게 시작했다. 중간에 이혁래 감독님이 들어오시고 여러 가지를 같이 하게 됐다. 하면서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은 못 할 것 같았다. 작품이 나온 것을 보니 저희 생각보다 훨씬 더 잘 만들어주셔서 기뻤다. 이 자리에는 같이 참석하지 못한 조합원 친구들이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신순애는 “김정영 감독님께서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셔서 제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대신 13살 여공의 삶을 썼으니까 뒷전에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이 앞에 나와 서주기를 바랐다. 제 생각과 다르게 주인공이 돼 두렵기도 하다. 함께 했던 친구들에게 미안함도 있다”고 전했다.

임미경은 “이 다큐를 찍겠다고 감독님이 오셨을 때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옛날 일을 다시 끄집어서 생각한다는 것이 싫었다. 저는 정말 싫었다. 찍는 그 자체가 싫었다. 딸이 ‘엄마 남의 일은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으니까 해 봐’라고 해줘서 용기를 냈다.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이 다큐를 보고 제 삶을 다 알게 된다. 남들이 알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다짐했던 얘기들이다. 세상에 나왔으니까 많은 분들이 보고, 옛날에 평화시장에서 열심히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찾아와주고 같이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유), (주)영화사 진진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현실영화 속에서도 소개되며 많은 이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실제 상황을 겪은 이들의 경험담과 문건들로 더욱 안타까움을 더했다. 출연자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을 안 시켜도 돼서, 집이 가난해서 등을 이유로 어린 나이에 평화 시장에 발을 디뎠다.

이숙희는 “평화시장 노동 상황이 너무나 나빴다. 15시간, 16시간 씩 작업하고 한 달에 2번도 쉬지 못했다. 추석, 구정에는 2주 정도씩 공장에서 3시간 먹고 자고 일을 했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재단사가 시다에게 함부로 말을 하거나 자신의 잘못한 것의 책임을 떠넘겼다. 손찌검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만 해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다. 백열등 아래서 장시간 일을 해서 햇빛 있는 곳에 가면 눈을 잘 뜰 수 없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신순애은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시작해서 성공회대 사회학부에 입학하게 됐다. 나이는 저보다 어리지만 동기들이 제 호칭 때문에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언니라 할까 이모라 할까 그랬다. 앞에 왕을 붙여서 왕언니라고 하더라. 동기들이 ‘전태일 평전’이 눈물이 나서 읽을 수 없다는 얘기를 해주더라. 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리랑’ ‘한강’ ‘태백산맥’은 넘길 때마다 울었다.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어보니 평전에 나와 있는 것보다 실제 시다 생활을 할 때는 더 힘들었다. 생리할 때는 정말 힘들었다. 지금도 트라우마가 있다. 생리대가 약국에 있는데 돈이 없어서 사러갈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이 생리대가 없어서 깔창으로 대신 했다는 뉴스를 듣고 제 몸이 굳어가는 것 같았다. 18살, 19살에 어절 수 없이 점퍼 속주머리를 공장장 대신해서 쓰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있어서 눈물이 안 났던 것 같다”고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전했다.

임미경은 “공장이 굉장히 작다. 다락을 내서 일어설 수 없다. 하루 종일 엎드려서 일을 한다. 환풍기도 없어서 그 여름에 선풍기를 튼다. 2시간 정도 틀면 날개가 안 보일 정도로 먼지가 끼어서 작동이 안 된다. 숨 쉬기 조차 힘들었다. 다리미질을 하면 원단에서 나는 냄새가 힘들고 역겨웠다”며 “정말 힘들고 어려웠는데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며 깊은 울림을 전했다.

이들의 당시 급여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숙희는 “시기 별로 다르다. 68년도에 평화시장에 들어갔다. 하루 일당이 90원이었다. 66년 들어간 전태일은 50원이었다. 시다 일 때 한 달에 2700원을 벌었고, 미싱 보조가 돼서 7000원을 받았다. 월급으로 받는 미싱사는 1만 5000원정도로 기억한다”며 “친구 3명이 있어서 월급쟁이 미싱사보다 잘해서 월급을 올려달라고 면담했다.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으라고 말했다. 이렇게 옮겨 다닐 생각을 하면 ‘기술도 못 배우고 거지가 돼서 깡통 차게 된다’는 말을 해서 분노했다. 그전에 12시까지 일하고 한 번도 빠짐없이 일할 때는 며느릿감이라고 입이 귀에 걸린 표정으로 말을 했었다. 노동조합에 더 관심을 가지게 간접적인 동기 부여를 해줬다”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신순애는 “66년도 첫 월급이 700원이었다. 버스 요금이 일반은 10원, 학생은 5원이다. 가장 불평등하다고 처음 느낀 것이다. 13살인데 교복을 안 입었다는 이유로 10원을 냈고, 대학생은 5원을 내고 다니더라. 당시 콩나물 10원 어치면 여덝 식구가 하루 종일 밥을 먹을 수 있는 정도다”고 차별 받던 여공들의 힘들었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또 “미싱사는 도급제라서 1만원, 1만5000원을 받았다. 68년 가을 쯤 미싱 보조하면서 2~3000원을 받았다. 미싱사가 되고는 제가 삼일빌딩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꿈을 꿨다. 처음으로 1만 2~4천 원 정도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명절에 일을 해도 시다에게 더 주는 것이 없었다. 가게 사장이 일을 잘 한다고 준 보너스 500원을 받은 적이 있다. 식용유 1.8리터, 설탕 3kg 짜리가 전부다”며 “노동 운동을 하며 월급봉투의 이름이 신순애라고 바뀌었고 월차 수당, 생리 수당이 생겼다”고 회상했다.

이에 이숙희는 “신순애와 제가 오랜 친구다. 저는 숙녀복이고 신순애는 아동복, 와이셔츠라 임금 격차가 커서 깜짝 놀랐다”고 덧붙였다.

▲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유), (주)영화사 진진

힘든 상황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을 버티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동료들. 이들은 노동 교실을 통해 꿈으로만 꿔왔던 공부를 하고, 공장의 몇 번 시다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대우를 받게 됐다. 그것이 노동 교실을 지키기 위한 작지만 강한 투쟁, 1977년 9월 9일 사건의 원동력이 됐다.

이숙희는 “노동교실은 하나의 교실로만 저희에게 있던 것이 아니다. 계속 일만하던 저희에게 배움터였고, 놀이터였다. 자신을 키워 나가는 장이였다. 일이 10시, 11시에 끝나도 들렸다가 집에 갔다. 집보다 소중한 장소였다. 그곳을 뺏기면 안 된다는 것을 누가 말하지 않아도 공통적으로 느껴서 어린 아이들도 달려 왔다. 큰 회사는 2교대, 3교대 작업해서 피해를 덜 받았지만, 평화시장은 영세한 작업장이 많았다. 싸움에 나서면 일당을 포기하고 나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동자가 재고 생각하지 않고 달려갈 수 있었다. 그만큼 노동교실을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하고 인격적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껴서 아무 말 없이 달려갈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노동 운동에 동참하게 된 이유를 역설했다.

신순애는 “66년 13살에 7번 시다로 시작해 제 이름을 단 한 번도 말하고 불러본 적이 없다. 7번 시다, 1번 보조, 3번 미싱사, 1번 오야 미싱사였다. 노동조합을 갔더니 신순애라는 이름을 불러줬다. 노동 시간 단축에 참석하게 된다. 120~150명 정도 있었다. 야간 통행금지가 있어서 10시 30분에 빠져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28명이 밤새 있었다. 밤 8시에 전깃불을 내리는 성과를 거뒀다. 두 번째로 농성을 참석하게 된 것인데 그 기쁨과 희열이 있다. 공순이가 신순애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최초의 성과였다. 임금 인상, 퇴직금 싸움을 하면서 한 번도 져보지 않았다. 9월 9일도 두렵지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참석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임미경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평화시장에 갔다. 기술을 배우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더라. 그곳에서는 이름이 없다. 몇 번 시다라 부른다. 미싱을 타기 위해서 시다를 한다. 미싱을 탄다는 것은 시다를 3~5년을 했다는 것이다. 미싱을 빨리 타고 싶었다. 요즘은 수당이 있지만 여기는 15일씩 밤에 일을 해도 급여는 똑같다. 물론 일요일이 휴일인 것도 없다. 한 달 급여는 항상 똑같았다. 일찍 끝나는 경우가 절대 없다.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서 불이 나가면 그때가 잠깐 쉬는 시간이다. 그러면 그 날은 더 늦게까지 일한다. 버스가 끊어지면 산길을 걸어서 집에 갔다.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며 “공부를 너무 하고 싶은데 공부를 못하고 있었다. 중등 과정을 무료로 가르쳐 준다고 했다. 노동교실이 제가 일하던 공장과도 가까웠다. 늦게까지 일하고 집에 가다가 노동교실과 조합을 알게 됐다. 굉장히 어렸는데도 이렇게 하는 것은 인간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대학생들이 야학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근로기준법도 알려줬다. 그때 당시는 제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못 가게 차단했을 때 목숨을 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나이가 어려서 그렇게 하면 판사, 검사가 ‘너네 잘못 없으니까 노동교실 돌려줄게’라고 해주는 줄 알았다. 공평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고 안타까운 상황을 전하며 보는 이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미싱 타는 여자들’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김 감독은 “제목을 정할 때 창신동 꼭대기에서 작업하는 여성 노동자가 얘기를 했다. 나는 미싱을 타고 아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원단을 배달한다고 하더라. 하늘을 나는 것을 생각했다. 그 이후에 공장에서 다른 분들과 인터뷰 할 때마다 ‘미싱을 탔다’고 얘기를 하시더라”며 “움직이는 제목을 하니까 영화를 찍으며 기적 같은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재판도 그렇고, 찍는 내내 코로나19여서 합창 장면도 조심하며 찍었다. 선생님들이 열심히 해주셔서 고마웠다. 사적인 꿈이지만 양희은 선생님이 보러 오셨다. 일면식도 없지만 매니저 전화를 알게 돼 연락을 드렸다. ‘연대의 마음으로 오셨다’고 해서 든든하고 성덕이 됐다.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며 영화가 스스로 굴러가고 있구나를 자랑하고 싶다”고 감회를 밝혔다.

그런 그의 바람이 통한 것인지 ‘미싱 타는 여자들’은 각종 여성영화제를 비롯해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제16회 런던한국영화제에 초청되며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또 영화의 열렬한 팬을 자처한 ‘기생충’ 봉준호 감독은 “전태일 말고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다. 그들의 기억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정성스레 축복해 주는 영화적 손길이다. 빛과 어둠 속에서 눈물로 웃음도 하나로 뒤섞이는 라스트에 이르르면 누구나 다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왜 꼭 극장에서 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이라고 영화를 강력 추천했다.

봉준호 감독은 전일 진행된 시사회 전에 깜짝 등장해 “한국 노동사를 거창하게 말하기 이전에 개인 한 분 한 분에게 어떤 사연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지, 해야 하는데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사려 깊게 하나하나 풀어내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재밌는 영화였고, 또 감동적인 영화였고, 사려 깊은 영화였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의 실타래들을 하나하나 풀어주는, 아름다운 화면으로 찍혀져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유), (주)영화사 진진

또 메인 포스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출연자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의 청춘을 노석미 화가가 다시 그렸다. 김 감독은 “저의 오랜 지인이다. 절친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친구다. 독립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친구에게 부탁하기 어렵다. 그의 그림이 신순애 선생님의 책에 딸이 그려준 그림과 화풍이 비슷하다. 선생님들이 어둡고 힘든 나날이었지만 그 당시의 패션 기술자다. 과거를 얘기할 때 눈을 반짝이며 얘기하는 것이 빛나보였다. 그 밝은 색깔과 소녀시절 과거를 너무 슬퍼하지 않고 로즈버드(아름다운 소녀)로 잘 포착해서 그려줘서 고맙다”고 전했다.

극 전반을 관통하는 음악에 대해 이 감독은 “영화 ‘미성년’ 박성도 음악 감독이 참여했다. 기타리스트로 실력을 인정받은 뮤지션이다. ‘미성년’ 영화 음악이 굉장히 좋았다. 영화에 잘 녹아들어서 음악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이 않아서 아쉬워하더라. 여러 인연으로 연결이 돼 저희 영화 음악을 맞아주시게 됐다”며 “기본 테마 3곡으로 전체 영화를 구성했다. 기존에 있던 곡이자 실제 인물들이 40년 전에 부르시던 ‘흔들리지 않게’와 찬송가 ‘뜻 없이 무릎 꿇는’을 변주하면서 썼다. 하나는 오리지널 곡으로 쓰고 싶었다. 가장 원했던 분위기는 춤을 출수 있는 곡이지만 듣다보면 쓸쓸한 느낌이 드는 곡이었다. 두 번인가 만에 완성을 해서 정말 만족스럽다. 테마 음악이 오프닝과 ‘제2의 전태일’이라는 말,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잘 잡아줬다. 저도 연출자로서 굉장히 만족한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 시절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신순애은 “99사건 나기 전에 8시간 근무 시간 단축을 할 때 잘 몰랐다. 노동조합에서 중등과정 무료로 해준다고 해서 공부하는 재미로 갔다. 통행금지가 있어서 밤새 앉아있었다. 새벽이 되니까 갑자기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가 걱정이 되더라. 이소선 어머니에게 집에 가서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했다. 이소선 어머니가 ‘꼭 다시 와야 해’라고 하셨다. 집에 가니까 엄마가 저에게 ‘어제도 밤 샜니’라고 했다. 아니라고 말도 못하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며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다시 평화시장으로 갔다. 영양실조와 과로로 쓰러지고도 이튿날 출근을 했다. 출근 시간이라 공장으로 가야하는데 이소선 어머니와 약속한 것이 생각났다. 21살, 22살이라 노동조합을 잘 몰랐다. 공장 갈지 노동교실로 갈지 고민했다. 내 몸은 노동교실로 가고 있더라. 어린 나이에 일밖에 모르던 제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을 칭찬하고 싶다. 지금도 부끄럽지 않게 잘 살고 있어서 제 자신을 칭찬하고 싶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과거의 상처를 다시 꺼내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를 통해 비극을 반복하지 않게 하는 힘이 발휘될 것이다. 기자 간담회에 나선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을 비롯해 이순자, 임경숙, 박연준, 조미자, 박태숙, 이승철, 김선주, 신광용, 정선희, 김덕순, 성양자 등의 출연자들은 함께 힘을 모았던 동료들과의 재회를 꿈꿨다. 영화 개봉을 간절히 바란 것도 그 이유라고.

이숙희는 “영화를 통해 그 당시 고생하고 애쓰고 상처받은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다. 전태일 재단, 전태일 기념관으로 연결됐으면 좋겠다. 임미경과 함께 인터뷰한 임경숙이라는 친구를 40년 만에 만났다. 영화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초기에 함께 하던 분도 만나게 됐다. 오랜 세월 동안 고생했지만 연락이 안 되는 친구들이 많다. 제가 올해 70살이 됐다. 기억을 하려고 해도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만나고 싶은 바람으로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 전국에서 상영된다면 더 빨리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바람이 있다”고 소망을 전했다.

김 감독은 “이 프로젝트를 할 때 선생님들이 ‘극장에 걸려서 이 영화를 보고 연락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동창이 있지도 고향이 있지도 않다’고 ‘동료, 동지들을 다시 봤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주셨다. 마지막 합창 장면을 함께 해주시는 분들은 활동을 꾸준히 하시던 분들이다. 99사건 그 이후 무서워서 못 나왔던 친구들, 같이 일을 했던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전국에 개봉해서 전태일 재단이 있으니까 그곳을 통해서 다 만났으면 하는 것이 제작진의 바람이다”고 덧붙였다.

▲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유), (주)영화사 진진

노동 운동을 전개한 인생 선배로써 이숙희는 “현재 노동현장에서 노동하고 있지 않아서 감히 말하기 어렵다. 그때 혼자가 아닌 함께라 겁 없이 싸울 수 있었다. 퇴근 시간, 시다 임금 직불제, 퇴직금을 만든 것이 함께라서 할 수 있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가는 방향을 제일 먼저 찾아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고 당부를 전했다.

임미경은 “저는 나이가 어려서 노동운동이라는 것을 잘 몰랐다. 다만 ‘인간답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학생들도 많이 참여를 해줬다. 지금은 공부해서 좋은 곳 취직하기 급급하고 바쁘다. 그때는 학생들이 저희들을 많이 도와줬다.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학생은 학생의 길을 노동자는 노동자의 길만 간다. 학생들이 공부를 마치면 노동자가 된다. 다 같이 하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 길을 갈 것이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은 다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 나만 돈을 많이 벌면 된다는 생각 보다는 같이 잘되게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공부하는 분,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 하나가 돼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밝혔다.

끝으로 이 감독은 “앞선 시사회에서 임미경 선생님의 아들이 함께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고 어머니께 ‘이 영화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보고 나면 힘이 생길 것 같다’고 하셨다.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시기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내서 시작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애니메이션 ‘태일이’가 개봉하고, SBS 예능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 청계피복노조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것에 이어서 저희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태일이’가 상영됐을 때 한 고등학생이 여성 노동자들 이야기를 궁금해 했다. 우리 영화가 개봉할 때 꼭 저희 영화를 봐달라고 그 시절 공장에서 일을 했던 시다들이 나오는 이야기라고 말을 했다. 꼭 보고 싶다고 얘기를 하더라. 저희 영화가 순조롭게 잘 개봉돼 많은 사람들이 보길 원한다”고 전했다.

이숙희는 “저희 영화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평화시장 노동자, 앞에 있는 사람들은 이름이 호명되지만 그 뒤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위안을 받기를 바란다”고 바랐다.

신순애는 “찍으면서 감독님을 보면서 중노동도 이런 중노동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감독님을 보상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다. 많은 분들이 보고 감독님이 애쓰신 것이 보상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1977년도 얘기지만 지금 현재 진행 중이라고 생각한다. 3D 업종 노동자는 여전히 힘들다. 못된 것은 OECD에서 다 1위다. 노동 시간 길고 자살도 낙태도 1위다. 70년대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본다.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임미경은 “안 찍으려다가 찍은 사람이다. 가슴 속에 꼭 감춰두고 싶었던 과거를 들춰냈다. 내 영화를 내가 보고 매번 우는 것이 기분이 나쁘다. 정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이 정말 많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힘내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다. 꼭 이 영화를 봐야한다.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조언을 건넸다.

한편,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전하는 깊은 울림과 치유를 담은 ‘미싱 타는 여자들’은 오는 20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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